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그니차 전투 (문단 편집) === 포진 === [[파일:lie1_eng.gif]] 1241년 4월 9일, 대공 헨리크 2세는 폴란드 연합군을 모아 [[레그니차]]에서 동남쪽으로 4km 떨어진 레그니키에 폴레(Legnickie Pole, 독일어 Wahlstatt)에 포진했다. 헨리크 2세는 군대를 네 부분으로 나누었다. * 제1진은 [[모라비아 변경백국|모라비아 변경백]]의 적자인 볼레슬라프(Boleslaus Děpolt)의 지휘 아래, 모라비아인, 대 폴란드 지방의 농민 징집병, 독일 [[바이에른]] 출신의 자원병, 소수의 기사대로 구성되었다. * 제2진은 크라쿠프의 기사이자 고위귀족[* 그의 형이 크라쿠프 궁정의 팔츠 백이었다.]이었던 술리스와프(Sulisław of Cracow)의 지휘 아래 대폴란드([[비엘코폴스카]]), 소폴란드([[마워폴스카]])와 [[크라쿠프]], 시에라츠, 웽치차 공국 등의 기사와 종자들로 이루어졌다. * 제3진은 오폴레-라치부시 공작 미에슈코 2세(Mieszko II)가 이끄는 그의 영지에서 데려온 징집병과 소수의 기사대였고, * 마지막 제4진은 본진으로서 [[헨리크 2세]]가 직접 이끄는 실롱스크의 기사대, 폴란드 각지의 기사대와 성전 기사단 등 서유럽에서 지원 온 기사단[* 현재 독일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의 참여 여부는 의심스럽다고 한다. 독일 기사단장이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었으나 이것은 거짓이고 1244년까지 살았다고 한다. 다만 성전 기사단의 참여는 확실한 듯 싶다. 완전 무장한 기사들로 약 68~88명이 참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용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파일:legnica soldier.jpg]] 본진의 주력이었던 실롱스크의 기사들은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이 상상화의 기사는 13세기 중반의 실롱스크 기사로, 시기적으로 레그니차 전투와 일치한다. 트렌지셔널 아머나 플레이트 아머가 나오기 전, 중세 중기 유럽의 기사들이 최대한 중무장한 모습으로 성전기사단, 일부 폴란드 기사들도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몸 전체에 메일(mail)을 두르고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마갑을 입혔으며 방패와 약 3~4m에 이르는 랜스를 들고 돌격하였다. 백병전 시엔 검, 메이스 등의 무기를 사용했다. 전투에 참여한 보병은 대부분 징집병이었기에 사진의 보병(13세기 말 폴란드 보병)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 참고로 뒤에 있는 하얀 보병은 발트 십자군의 일부였던 도브르진 기사단(Order of Dobrzyń)의 '형제' 기사이다. 이 기사단은 문양이 검의 형제 기사단과 비슷하지만 두 기사단은 엄연히 달랐다.] 1월 12,000 ~ 20,000여 명으로 폴란드를 침공했던 몽골군은 레그니차까지 진군하는 3개월의 기간 동안 병력을 조금씩 손실해 전투 직전 그 수가 약 8천 남짓이었다고 한다. 이들 대부분은 [[기마궁수]]였고 소수는 전투에 결정적인 쐐기를 박을 중장기병이었다고 한다. 몽골군의 사령관이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은데, 대체로 폴란드를 침공했던 차가타이의 차남 바이다르(Baidar), 바투의 형 오르다(Orda)였을 것이라고 본다. 어쨌든, 몽골군은 군대를 4개로 나눴고 기마궁사들로 이루어진 전방 3개 진은 횡대로 넓게 벌렸다. 후방 중앙에는 기마궁사와 소수의 중장기병들이 예비해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